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은 해이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고,

독립운동가들은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것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항일투쟁의 역사는 새로이 쓰여졌습니다.
독립신문 88호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전승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35년의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에게 큰 승리를 안겨준 청산리 전투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지에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독립군은 1919년 하반기부터 국내진입작전을 펼쳤고, 1920년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단체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습니다.

 

그 직후에 일어난 전투가 1920년 6월 7일에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봉오동 전투입니다.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

홍범도 장군

일본은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만주의 독립군을 없애기 위해 만주의 군벌에 압력을 가하는 외교적인 노력과 더불어 대규모 군사 동원을 계획하였습니다.
일본은 9월에 마적이 훈춘 주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을 꾸민 뒤 이를 명분 삼아 중국 땅인 만주에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군사력을 비축하고자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연합부대' 등으로 나뉘어 북간도를 떠나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하는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던 독립군을 일본군 기병 등이 추격해 오자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싸웠습니다.

 

김좌진 장군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

 

그 첫 전투가 1920년 10월 21일에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싸워 승리한 백운평 전투입니다.

그리고 10월 22일,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던 어랑촌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와 일본군을 협공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청상리 대첩 승리 기념촬영

이후부터 10월 26일 새벽 까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연합부대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각자 싸우거나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우며 엿새 동안의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이기는 쾌거를 이루었고 독립군의 기본 군사력을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6일간 치러졌던 청산리 전투는 사실상 한국 독립운동사 최대의 승전보이자 '대첩(大捷)'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청상리 전투 대패 후 퇴각하는 일본군

 

2020년 항일독립운동을 기억하며 우체국에서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어요.

기념우표는 독립군의 전투정보가 실린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의 보도기사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던 서양화가 김태(1931~)의 민족기록화 <청산리 전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0년 전 이맘때 울려 퍼진 일본군을 향한 독립군의 함성을 떠올리며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을 기억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에 대해 알려주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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